한참 핏빛으로 너울지는 석양 드리운 세상에 푸르고 검은 밤 같은 둘이 서 있죠. 서로를 마주보고 버티듯이 서 있던 이들이 어느새 나란히 손을 잡고 있다는 건 운명 같기도 해요. 하지만 운명이라는 건 둘에게 어울리지 않아서, 차라리 이 둘에게는 그 맞잡음을 더러 그들의 선택이라고 해야 할 텝니다.
 이곳이 황홀하지는 않아요, 도리어 비리고 슬픈 냄새가 도처에서 나는 세계. 오로지 홑겹만을 걸친 것 같은 잡은 손 하나로 이따금 불어오는 돌풍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답니다.
 그러나 에디, 한 번 헤어져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죠?
 그러나 마리안, 말했잖아요, 다 괜찮을 거라고.
 당신의 언어와 당신의 위안이 약조가 됩니다.
 그 무게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

© 말차 님 | 람 님 | 파인애플을두른도도새 님 | 0 님

End of nostalgia

  •  처음 만난 소년은 어색한 낯을 하고 있었다. 마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갑게 소개하는 부부와 그 아래 한참 작은, 자신과 엇비슷한 키의 남자애를 주시했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한 첫 날.
     에디 럭스포드와 마리안 스노우든, 아주 어린 나이에 맞닥뜨린 약혼이라는 말은 당황하거나 황망할 것 없이 그저 낯설기만 했다. 총 네 명의 양친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둘을 인사시켰고, 두 아이는 그래서 서먹하게나마 서로에게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점차 가까워지는 데에는 마리안의 공이 컸다. 본래부터도 말이 없고 무뚝뚝했던 에디가 하물며 낯선 '약혼녀'에게 다가가기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마리안은 양 집안이 자신들을 대동한 식사 자리에서 자주 먼저 에디에게 말을 걸고 손을 잡아 이끌어 레스토랑이나 저택의 바깥으로 향하곤 했다. 그래도 약혼녀라고, 혹은 애초에 자신에게 처음 다가와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에디 럭스포드는 군말 없이 팔랑팔랑 뛰어가는 여자애의 뒷모습을 따라 걸음을 재게 옮겼다. 어차피 바깥에 나가봤자 양가를 경호하는 수행원들의 눈을 피해 어딘가로 갈 수는 없었으므로, 특별한 무용담이나 생경한 경험이 생겼다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조잘거리는 말소리에 가까워지는 거리. 동시에 익숙해지는 끌어당기는 손길.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만남에서, 에디 럭스포드는 비로소 마리안 스노우든에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희미하고 서툴게나마 보인 미소였으나 마리안이 그의 낯을 보고서 어떤 놀라운 표정을 지었는지 에디는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소년은 그때 이렇게 말했다. 봄꽃 흐드러지는 정원 안에서. "너랑 약혼해서⋯⋯ 다행이야." 그건 진심이었다.
     어떤 대화로 기인하여 그 말이 나왔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마리안이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는 것,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는 무게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그 말이 몹시 기뻤다는 것, 그리고 자신도 그 마음에 꼭 보답하고 싶다는 의지가 고개 내밀었던 것.
     그러나 그 말이 서로를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마지막 기억이 될 줄은 둘 모두 알지 못했다.
  •  마리안은 느릿느릿 책장을 넘겼다. 그가 손가락으로 짚은 끝에는 마침 이런 문장이 나온다, "당신이 눈멀지 않았다면, 이런 것이 오래 갈 수는 없다는 것도 모를 리가 없을 거요." / "무엇이 오래 갈 수 없다고요?" / "우리가 같이 있으면서도 하나가 아닌 것.”¹ 인물의 대사를 읽고 난 직후 마리안은 고개를 돌려 흠칫 어깨를 떨듯이 에디를 돌아봤다.
     마리안이 돌아봤을 때에 에디 럭스포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둔 채 이어폰을 왼쪽 귀에만 꽂고 있었다. 마리안 스노우든은 그의 오른편에 있었기 때문에 이 남자가 왜 굳이 한쪽 귀로만 음악을 듣는지에 대해 한숨만큼이나 쉽게 납득했다. 그러니까, 정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던 것을 참아내고 마리안은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저녁 같이할까요?" 다른 데를 멍하니 보고 있던 에디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저녁식사 말입니까?"
     "네.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포장해 올 테니까, 같이 들어요."
     "함께 가겠습니다."
     "이 정도 거리는 혼자 다녀와도 될 것 같은데요."
     "아뇨."

     나름대로 힘 있는 대치였다. 에디가 자신의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으므로 마리안은 이번에야말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그럼." 허락하는 듯한 말이 떨어지자마자 에디가 왼쪽 귀에 꽂았던 이어폰도 빼 갈무리했다.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이다.
     저녁 메뉴로 고른 것은 간단한 수프였다. 조개와 새우가 듬뿍 들어간 클램차우더와 거기에 함께 곁들일 치아바타. 포장해 오는 내내 에디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곁에 붙어 있었으므로 마리안도 고집스레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결국 집에 들어설 때까지 내도록 침묵 상태를 유지했고, 그건 접시를 비롯한 식기를 식탁 위에 차릴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안은 내심 서운했다가, 아까 전에 읽다 만 책 안의 또 다른 문구를 떠올렸다. '그들은 밀폐된 공간에 누구의 방해도 없이 단 둘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운명에 단단히 묶여 있어서 차라리 다른 세상 사람들 같았다.'²
     하지만 마리안 스노우든은 책 속의 인물이 아니며, 그래서 참을 이유가 없다. 그는 에디가 접시에 거의 코를 박다시피 수프를 떠먹고 있는지라 표정이 보이지 않는 맞은편 자리의 머리에다 대고 불쑥 물었다.

     "그렇게 제 얼굴이 보기 싫나요 ?"
     "⋯⋯."
     "그래도 당신 일이잖아요, 이건."

      당신이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야 상관없지만, 이라고 비꼬듯 덧붙이려 했는데 그것만큼은 잘 되지 않았다. 마리안 스노우든은 그제야 에디 럭스포드에게 있어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은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적막한 저녁식사가 계속됐다. 마리안은 이 팽팽한 대치 같은 경호 임무가 언제 끝날지에 대해 생각한다.

    ¹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중
    ² ¹과 같은 책
  •  눈을 감으면 바다 생각이 났다. 얼마 전 마리안과 함께 간 오레테라의 해풍이 밀려오는 착각. 마리안은 그곳에서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당신이 나를 슬프거나 기쁘게 하는 일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고.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에디가 왜냐고 물었을 때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당신도 날 궁금해 할 부분은 남겨두려고요. 라고 말했다.
     안 될 일이다. 에디 럭스포드는 마음을 다잡고 싶다.
     ⋯⋯다잡고, 싶다.
    상부에서 마리안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다. 그는 평소대로 행동하려 했으나 당연히 유크리아의 입지와 국가보안연구소에서 개발되는 신기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령을 받고도 마리안의 곁에 있고픈 사람으로서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종일 흔들리는 정신은 아무래도 옆에 있는 경호 대상이자 동거인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마리안은 읽고 있던 책 안쪽에 책갈피를 끼워 그대로 펼쳐두고 에디에게로 다가왔다. 저녁식사 시간을 말하려나 싶던 차였다. 그때에 마침 바깥에 황혼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여전히 지척에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물리적인 거리조차 이제는 몹시 좁혀졌다. 그러므로 에디는 눈을 내려 곧장 마리안이 읽던 책의 페이지를 훑을 수 있었다. 여러 번 읽은 것인지 마리안의 책은 조금 손때가 묻고 펼쳐져 있는데도 기우뚱 덮이지 않는다. 끼워진 책갈피의 모서리 바로 아래에 가리키는 것처럼 꽂힌 문장이 있었다. '아처'라는 인물이 '엘렌'에게 하는 말이었다. "내가 바라는 건⋯⋯, 난 어떻게든 그런 말, 그런 구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세계로 당신과 함께 떠나고 싶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삶의 전부가 되는, 인간 대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곳, 그 밖의 어떤 것도 중요치 않을 그런 곳으로."

     "에디."
     "⋯⋯"
     "말할 게 있어요. 심각한 건 아니고요."

     에디 럭스포드는 정말이지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스스로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실 어떻게든 그는 마리안 스노우든과 어떤 구분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함께 떠나고 싶었다. 당신은 나에게 슬프거나 기쁘게 하는 일들에 대해 숨기지 않아도 될 것이라 이야기했건만 나는 그럴 수가 없어서 그렇다. 책무와 부채감은 벗어던지고, 서로가 그저 서로로 있을 수 있는 세상이 어디 존재하기는 하나 싶었다, 심지어는 땅의 끝이라 불린 데까지 가서도 그런 말을 고백하지는 못했는데.
     그런데 마리안은 느리게 손을 뻗어 에디의 뺨을 손바닥에 대었다. 실상은 그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린 모양새다. 마리안 스노우든은 그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 괜찮아요."
     "⋯⋯마리안." 에디는 마리안, 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네, 다 괜찮을 거라고. 그냥 그걸 말해주고 싶었어요."

     마리안의 어깨 뒤로 노을이 내리고, 그래서 이 여자의 푸른 눈동자는 더욱이 핏빛으로 물든 창밖의 세상과 대비되기 마련이다. "⋯⋯예." 에디는 마치 행복한 패배를 선언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미소 지으며 마리안이 손에 제 낯을 기울였다.